유길준 이것저것

...결국 리플렉시스 블로그는 버렸기 때문에 이 '인물 이것저것' 시리즈를 여따가 쓰는데
네쵸TLP콘티임(?!?!????)


원래는 수업 발표문 초고로 작성한 이야기.
(거의 내가 지껄인 것을 발표조원이 받아적고 거기에 내가 다시 수정한 것이지만) 나중에도 계속 참고할 것이 있을 것 같고 또 인터넷에도 볼 만한 글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포스팅해 둠.





* 일대기

1856년 10월 24일 서울 출생
69년 외조부 이경직에게 한학 교습 받기 시작. 천재성.
71년 이경직의 친구인 박규수가 유길준의 총명을 알아보고 그를 아껴서, 반남박씨와 기계유씨 집안 사이의 원한이 해소됨.
72년 친척인 유만주에게 수학. 민영익을 만남.
73년 조정에서 은퇴한 박규수와 교류, <해국도지>를 전수받고 신학문 권고받음. 김옥균을 만남.
74년 과거 포기 선언 이후 박규수 제자들과 어울림
80년 2차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갈 뻔했다가 재혼 문제로 그만둠. 김홍집을 만남.
81년 조사시찰단을 따라 일본유학 ->82년 민영익의 요청으로 귀국, 외아문에서 주사
83년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유학. 피바디 박물관장 모스의 지도로 영어 학습
84년 9월 GDA(요새 학비로 1년에 5천만원 하는 유서 깊은 prep-school) 입학, 12월 갑신정변으로 학업중도포기(최종학력이 고교중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85년 유럽과 일본을 두루 돌아보고 12월 귀국. 중립론 저술
귀국 직전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나고 들어와, 입국하자마자 체포되어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7년간 유폐(이게 TLP 본편 이야기) ->너무 오래 유학하지 않은 게 오히려 주체적 개화관을 확립하는 데 도움?
87년에 민영익의 주선으로 그의 별장인 취운정으로 옮겨 살게 됨.(운미님ㅠㅠ) 전보다 자유로운 생활
89년 서유견문 탈고
유폐 시기에 주미공사 박정양의 영약삼단 위약 문제로 리훙장에게 3차례 답변서, 90년 이후로 활발해지던 외국상인들의 국내 이권취득 문제에 개입 (금청 : “언제까지 가둬두고 일만 시켜먹을 작정인가.” ㄱ-...;;)
92년 김홍집 어윤중 등이 상소 올려서 유폐 해제
94년 청일전쟁을 앞두고 大鳥圭介 주한일본공사가 경복궁 점거를 계획할 때 일본과 협의, 갑오내각에 지속적으로 참여
95년 (96년 양력 1월 1일) 내부대신에 취임
96년 아관파천으로 실각, 일본으로 도주
1907년까지 일본에 체류
그 와중에 02년에 고종폐위사건을 일으키고 고종이 보낸 자객에 의해 신변 위협. 일본 내에 유배지를 전전.
07년 순종 즉위 후 고종이 규정했던 소위 ‘을미사적’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 귀국함.
흥사단, 한성부민회, 민족산업진흥운동계열 단체에 가담, 초등본국약사, 초등본국지리 교과서 등 집필, 노동야학회에서 쓸 노동야학독본 집필, 대한문전(한국어 문법책) 집필
14년 9월 30일 사망


* 갑신정변(1884)

미국 유학 시절 prep-school(Governor Dummer Academy)에 막 입학했던 유길준에게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 대한 소식을 미국신문에서 듣고 1885년에 귀국하도록 함. 귀국 후 곧 유폐됨.
조선의 유년 시절 유길준은 김옥균 민영익 등 초기 개화세력과 폭넓게 절친했는데 그 개화 세력이 분열, 와해되는 사건이 갑신정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당시 청의 간섭하에서 군권을 가지고 있었던(친군우영사) 민영익을 비롯한 군사 책임자들을 척살. 그러나 민영익은 오히려 기사회생하고 청나라에서 위안스카이가 들어와서 정변을 진압. 홍영식, 박영교는 피살(비운의 홍영식은 이하생략)되고 나머지 갑신당은 일본으로 망명,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신변위협을 견디다 못해 85년경 도미.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결과적으로 개화 세력이 와해됨. 이러한 것을 목도하고 젊은 시절에 큰 충격을 입은 유길준은 이후 삶의 행적에서 정책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배후조종자의 성향을 띰. (예외적으로 전면에 나선 경우가 을미개혁)
한편 조선의 해외 유학생 정책의 변화가 해외 유학생으로서의 유길준의 입지를 매우 특별하게 만들어주기도 함. 다시 말해 구한말 서구 유학생을 통틀어 정부 정책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참여한 자가 유길준. 그의 유일하다시피 한 대외교섭 능력은 아관파천 전까지의 국정에 자기 의견을 반영할 기회를 많이 부여함. 외교문서나 갑오개혁 홍범 14조 등 정부의 공식 명문화 작업 상당수가 유길준에 의해 이루어짐. 유길준은 조선 말의 대표적인 갑부였던 민영익의 후원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미국 유학 및 유럽 연수를 다녀왔으나 갑신 정변 이후 정부가 대외 유학생을 거의 지원하지 않음. (민영익이 왜 유학 지원 안하냐 비판할 정도) 이후의 미국 유학생은 신학생 윤치호나 갑신당 서재필, 서광범, 변수 등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못한 유학생활을 보냈고, 귀국하지 못하거나 혹 귀국하더라도 내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를 보임.
(변수는 미국에서 최초로 대학까지 졸업했으나, 애석하게도(대체 왜???!?!?) 92년에 기차에 치여 사망한다. 서재필은 의대를 졸업하고 독립협회 시절에 한국에 들어와 정부 고문 역할을 맡아 좌지우지하기도 했지만, 곧 고종에 의해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 그 활동 기간이 짧다. 서광범은 미국 망명시절에는 생활고로 인해 체계적 교육을 받지 못했고, 더욱이나 갑오내각에서도 박영효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된 면이 강해 85년 7월 박영효가 실각한 후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주미공사라는 직책을 빌려 미국으로 도주하지만 미국 망명 시절 얻었던 폐결핵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곧 사망ㅠㅠ)


* 갑오개혁에서의 직접적인 참여와 실패 (1894-95)

직접적인 참여와 실세 역할 -서양 문물을 소개하던 대표적인 구한말 책이 바로 서유견문. 유길준은 유폐 시절 유학 시절에 정리한 자료를 모아 서유견문을 완성하고 조선 중립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아직 이론가에 머물뿐 정치에 아직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던 유길준은 갑오개혁 내각에 서서히 참여하기 시작한다. 주사직에서부터 내부대신까지 유길준은 1892년에서 1895년까지 과거 없이도 내부대신까지 급격한 승진. 유길준의 직접적인 내각 참여로 갑오개혁의 매뉴얼이 서유견문이었다는 평도 있음. 사실 유길준은 갑오개혁 이전 유폐 시절부터 정부의 일을 맡아서 함. 그 예로 청나라 영약삼단에 대한 답서를 유길준이 맡아서 함. 홍범 14조 초안 작성. 갑오내각의 형식적 총괄자였던 김홍집의 3차례 자살 시도(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5년 을미사변, 1896년 2월 아관파천)를 유길준이 말림.->얼굴마담이 사라지면 배후도 위험(?) 김홍집과 유길준의 ‘기묘’한 관계.
결정적으로 유길준이 갑오개혁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단발령. 1896년1월1일에 유길준이 내부대신이라는 고위직으로 승진하면서 동시에 단발령이 내려짐. 이 단발령에 유길준이 고위 대신으로서 직접 참여하여 정병하가 고종의 머리카락을 유길준이 당시 세자의 머리카락을 자름.  그리고 단발령 거부로 투옥된 최익현에게 단발령을 두고 논쟁을 벌임 (단발령의 성격 – 당시 내각의 지지 기반이 약했다는 것, 지방 유지 및 고종과 내각 간의 세력 갈등&전통사회에서 복식 개혁의 문제)
하지만 1월1일에의 단발령을 계기로 갑오, 을미 내각은 실패. 을미사변의 원한으로 일찍이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던 고종은 기어이 내각을 숙청하고자 2월 11일 아관파천과 동시에 내각의 주요 대신을 체포할 것을 명함. 유길준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단발령이라는 사건은 정치적 무리수가 되어 내각의 붕괴를 초래함. 내각 인사들이 압송되나 김홍집과 정병하는 가마로 압송되어서 죽었고 유길준은 머리를 써서 죄인이 어떻게 가마를 타냐고 손이 묶여서 걸어가겠다고 하다가 광화문 앞에서 일본 병영으로 도망감.  유길준의 기지. 생에의 집념-_-


* 유길준의 교육자로서의 삶 - 고종과 유길준의 관계(1907- )

순종 즉위 후 과거 갑오내각으로 구성된 소위 을미사적에 대한 사면, 유길준의 귀국.(유길준의 2자 유억겸이 13살에 아버지 얼굴 처음 봤다는 이야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종에게 읍소하면서 자기들을 죽이라고 한 건 고종의 뜻이 아니라 친러파의 명령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왕명으로 잡아들여진거고 (뭐 그 을미내각이 왕명을 빙자해서 마음대로 조칙을 내리는 짓을 해왔으니 상대방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이때 고종 앞에서 충정을 보여서  고종과의 오해가 대개 해소. 그리고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교육사업을 할 것”. 정치 활동의 포기는 친일파/친러파의 당파적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계기&개화세력이 자강운동, 교육입국으로 이어진 계열의 선구자 역할
이미 이때의 고종은 과거 광무년간의 ‘러시아식 전제군주+근대화’에의 열망을 버린 상태. 주권을 상당 부분 침탈당한 나라를 놓고 민족의식이라는 화두로 과거의 여러 당파(대원군파, 왕당파, 척족파, 친일파, 정동파…)들이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환경. 그 사이에서 유길준의 계몽운동이 초당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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