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류세니드 프로파간다 Leucenid Propaganda

천공성은 악마의 소굴이었다. 적어도 열두 살 소녀 에레디스 콘이 보기엔 그랬다. “일라티카 님은 어떻게 되었지?” 자기에게 다급히 묻는 사람들 앞에 무슨 대답을 해야 했을까. 본 대로 말하기에는 너무, 잔혹해서, 스스로도 차마 견딜 수가 없었는데.

“그러게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피난민 몰골의 남녀노소가 가득 들어찬 헛간 비슷한 곳에, 문간에서 따라 들어온 남자의 그림자가 다소 무심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에레디스는 그 나이 소녀로선 대단한 참을성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리고 말해야만 했다. 언젠가는 힘 가진 이들이 복수할 수 있도록, 이 짐승 같은 처사를 있는 그대로 낱낱이 알려야만 하는 게 그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고문을 당하고 계셨어요.” 진정되지 않는 목소리를 힘겹게 눌렀다. “손톱 발톱은 벌써 모두 뒤집히고, 살갗은 저며져 피투성이였죠. 팔다리에 진물이 심한 것을 보더니 사제들은 눌러 붙은 옷가지를 찢어서 벗기곤, 맨몸을 가리키면서 실은 여자였다고 놀려대기도 하더군요. 그러고 다시 인두를 들어서 속살을 지졌어요.”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에레디스의 머리에 가만히 한 손을 올렸다. 말을 멈추게 하려는 것일까. 측은하다 여기는 것이었을까. 소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일라티카 님은, 조금의 자백도, 심지어는 비명조차 지르시지 않았어요. 저는, 그래서 저는….”

남자가 대신 말했다. “일라티카 로이는 여러분들 모두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다고 말했습니다.”

“꼭 그래야만 했나요? 설마 우리가 그분을 보내고 안도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공작! 대답해 보세요!”

에레디스는 결국 온갖 억울함을 담아 남자를 향해 악을 썼다. 조막만한 손으로 주먹질도 했지만 귀족의 두꺼운 망토를 몇 번 허망하게 쳤을 뿐이다. “어떻게 사제라는 사람들이, 그런 잔인한 짓을….” 자기의 분노를 어떡하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혼자라도 구하러, 복수하러 나가고 싶은 이 마음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더 잘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 어린 전령사 소녀보다도 크로네 공작이라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여러분들의 가짜 신분을 만들어드릴 때까지, 당분간 여기서 나가셔선 위험합니다. 부디 일라티카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그러고서 소녀를 향해 특별히 당부하기도 하는 그였다. “콘 양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정신적으로 탈진한 듯 바닥에 주저앉은 에레디스를 두고, 남자가 사라지려는 순간 다른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크로네 공작!”

“당신은 수도귀족인데, 아무리 반천공성파라 해도 남들 다 몸을 사리는 마당에 왜 우리 같은 사람들을 굳이 돕습니까?”

그러나 공작은 대답 이전에 잠시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반문을 했다. “온정적인 대답을 원합니까, 아니면 수도귀족다운 대답을 원합니까?”

“미, 믿을 만한 대답을 해 보십시오.”

사실 온정은 믿지 않았다. 더욱이나 귀족의 변덕스러운 자애라면 알량한 위선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작은 굳이 이렇게 대답한 것이었을까. “나는 당신들을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연구 대상이 죽어버리면, 내 사업에도 지장이 많을 테니까 말입니다.”

 

*

 

그러나 죽고 사는 문제보다도 에레디스는 단지 가족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너무 가까워서 무섭지도 않을 정도였으니까. 단지 친밀한 누군가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해도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녀는 혼자 남아 왔었다.

확실히 생각하면 할수록 간밤에 공작의 마지막 말은 과연 우리들을 지켜준다고 믿기에 퍽 근거가 충실하긴 했다. 그러나 감정적인 측면에서 특히 에레디스 콘 개인에게 위안이 돼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단지 목숨만을 좀 더 길게 붙여준다는 약속일 뿐, 새로 신분을 얻는다 해도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될지조차 알 수가 없었는데. 존경하고 의지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보장되지 않았는데.

연구대상이라고 하는 말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자기를 위해 봉사하라고 할지도 몰랐다. 물론 아직은 그가 아무 명령을 하지는 않았지만 에레디스는 이미 순진함이라곤 내려놓은 아이였다. 너희는 사용처가 있으니까 살려둔다. 죽지 못하게 두 손 두 발 꽁꽁 묶어 둔다. 그렇다면 이용당하는 입장에선 그 사용처를 알아야 할 일이었다. 과연 마음대로 함께 죽으러 가지도 못하게 막을 정도로 그게 가치 있는 일인지를.

“밖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들었을 텐데 또 나와 있네.”

닿지 않는 키에 모자란 발판을 끌어다 쌓아 올리고서, 이때 에레디스는 담장 너머 수도 시가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등 뒤에서 문득 말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레 크로네 공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관 말라고,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을 때 놀라고 만 것은 사실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어렸고, 뒤에 있는 것이 어젯밤의 냉정한 공작보다 한참이나 작은 꼬마아이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

꼬마가 가까이 다가와서 에레디스는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창백한 피부에 녹색 눈동자, 그리고 어딘지 공작과 닮은 것 같기도 한 재수 없는 인상에 동그란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소년이었다. 키를 대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얼추 보기에 못 먹고 자란 에레디스보다도 작아 보였는데, 대충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그녀의 눈길을 빼앗은 점은 그러니까, 그 소년이 인사를 하겠다고 모자를 벗었을 때서야 비로소 드러난 어떤 특징이었다.

“류세니드 디엘 크로네라고 해.”

은발. 은발이었던 것이다. “넌 에레디스 콘이지? 아버지께 들었어.” 이어서 그가 묻는 말은 멍해져서 들리지 않았다. 전날까지 봤던 크로네 공작을 조그맣게 줄인 것처럼 생긴 그 아이가, 지금 천공성 사제들에게 난도질을 당하고 있을 ‘마녀’ 일라티카 로이처럼 은발이라는 사실만 에레디스의 뇌리를 지배했다.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아무 것도 없는데 발판 위에서 헛디뎌 떨어질 뻔도 했다.

그녀 알기로 샤마슈의 창설자이자 마법의 기원인 일라티카 로이는 선천적으로 은발인 덕택에 예언자라느니 현자라느니 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또 지금 천공성에 잡혀가서는 바로 그 은발이라는 것 때문에 거꾸로 이단이라고 마녀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런데 왜 저 소년이, 그냥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는, 그 신비의 징표를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러고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일까.

“혹시 괜찮으면 샤마슈 얘기를 좀 해줄 수 있어?” 평소라면 귀족 도련님의 도움 안 되는 호기심이라고 쏘아붙이고 왔을 에레디스지만 이때만큼은 뭔가 홀린 것처럼 발판에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현실 인간 같아 보이지도 않는 류세니드가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며 덧붙였다. “나도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 여기 온 건지 알고 싶은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날 보고 놀라기만 하고 아무도 가르쳐주질 않더라….” 뭐, 놀라기야, 에레디스도 매한가지였지만. 그녀가 소년의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해서, 마치 고해와도 같은 내력 설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

 

데몬에게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난 여자아이가 변경에서 목숨을 부지하기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죽게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텅 비어버린 마을조차 버릴 여력이 없었던 마지막 약자들이었으니까.

돈깨나 있어서 안전한 도시로 이동할 만한 이들이야 벌써 영주가 이 지방을 버릴 적에 다 같이 떠났었다. 남은 자들은 그래서 가장 힘없는 무지렁이들, 그 가운데 또 가장 힘없는 어린아이가 죽은 가정에 역시 죽어가며 붙박여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며칠이나 지났던가. 문득 인기척을 알아차렸을 때는 아마 도적 같은 것이 마을을 뒤지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도 없지, 하필 먹을 것이라곤 곡식 한 톨도 안 남은 빈집을 선택하다니.

이제 더 잃을 것도 없는 소녀는 그들이 헛수고만 하고 갈 것을 생각하며 괜한 남 걱정을 했다. 막상 생각이 들고 나서도 스스로 바보 같다고 조소할 정도였다. 지친 정신을 이렇게까지 부여잡고 있을 이유도 없었는데, 차라리 빨리 죽어버렸으면 배고픔도 고통도 없었을 텐데 의외로 숨이 잘 끊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여, 여기, 산 사람이 있어!” 자기가 있는 방의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도, 그래서 처음에는 꿈이라고만 생각하고 말았었다.

나중에 깨고 나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것이 영석 헌터들과의 첫 만남.

“이름이 어떻게 되죠?”

“에레디스.”

“참, 나와서 구조 요청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하마터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지나칠 뻔했잖아요.”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왜 귀찮게 구하러 왔냐고 했다가 아홉 살 에레디스는 난생 처음 뺨을 맞았다. 자기 나이 반도 안 될 아이에게 꼬박꼬박 존대로 호구조사를 하던 젊은 여자가 손이 꽤 매웠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미레나 콘이라고 소개했었다. “목숨을 소중히 하세요.” 뭔가 인간으로서의 감수성이 이미 끊어졌던 소녀에게, 그 아무 상관없을 말이 왜 그렇게 아프게 들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레나와 그곳의 다른 모두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이름은 샤마슈라고 했다. 헌터 집단이라고 알려진 것처럼 영석 탐사와 더불어 데몬전도 했지만, 요즈음에는 임페도를 당한 지역에 생존자가 없는지 수색하는 일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기들의 지도자, 혹은 현자라고도 불리는, 일라티카 로이의 가르침. 인간에 대한 박애와 차별 없는 존중이 그들의 지향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 미레나는 성도 없고 이름도 비격식인 근본 없는 꼬마 에레디스를 자기 여동생 삼겠다느니 하며 챙겼다. 실은 헌터들도 거의 가족관계가 끊겨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언, 언니…?” “그래,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니까 예쁘잖아.” 혹은 그렇게 해서라도 이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애착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지만. 에레디스에게 두 번째의 가족이 생기게 된 전말은 이러한 것이었다.

 

*

 

한편 샤마슈의 리더는 남들 앞에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나 헐렁하고 치렁치렁 늘어지는 옷을 걸치고, 가면을 쓰고, 뒤로 기다란 은발의 머리채만 늘어뜨렸을 뿐이라 그 신비한 모습에 사람들은 그분을 현자라고 불렀다. 또 현자라 함은 단지 외모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나오는 어떤 신통력이 수많은 헌터들을 매일 죽음의 현장에서 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외부인들은 이걸 마법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야.” 샤마슈 가운데 그 신통력을 배워다 쓰는 사람들이 몇 있어서 그들은 마법사라고 불렸다. 미레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초기의 헌터들은 그냥 데몬에게 죽을 각오를 하고 영석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었는데, 마법이라는 것이 퍼지고 샤마슈 조직이 알려지면서 살아남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헌터라면 누구나 그 마법이라는 것을 익혀보려고 노력했지만, 실전에 쓸 정도로 능숙해지는 사람은 고작 스물에 하나 정도라 주로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연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익히기 시작하면 어른들보다는 좀 낫다는 이유로 에레디스도 일찌감치 미레나로부터 기초적인 마법 공식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습에 투정이 없는 성미이고 의외로 손재주가 비상했기 때문에 곧 그렇게까지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곤 미레나도 예상치 못했겠지만 말이다.

“호호, 일라티카 님께 직접 배워야겠다, 에리 넌.” 얼마 지나지 않아 샤마슈 창설자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껏 헌터들로부터 주워들었던 신비로운 현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은발, 그래 긴 은발이기는 했지만, 그걸 머리 뒤에서 하나로 질끈 높이 묶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신발을 꿰매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신비감이 들었겠는가.

“이, 일라티카…, 님이세요?” 당황한 에레디스를 보며 그분은 허리를 펴고 후후 웃었다. 가면이라든가 현자 같은 차림새라든가 하는 건 대외용으로 준비한 이미지일 뿐이고, 본래는 소탈하고 가장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라는 게 그 다음에 알게 된 일라티카 로이의 실체였다. 그것이 샤마슈의 정신이라고 했다. “정신? 무슨 얘기인가요?”

“차차 알게 될 거랍니다, 꼬마 아가씨.”

“하지만 신발 꿰매는 것 정도는 마법으로 하셔도…. 손이 다 망가지잖아요.” 미레나가 타박을 했지만 그분은 그저 싱긋 미소만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미레나. 마법은 꼭 그것을 써야 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고, 이런 것은 힘들어도 사람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죠.”

차차 알게 된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에레디스가 결국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법이라는 강대한 힘의 기원 되는 사람이 한편으로는 저렇게 낮은 모습이 있다는 것만은 대단히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비밀, 지켜 줄 건가요?” 전체적으로 샤마슈가, 일종의 종교 결사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일라티카 로이의 가르침이었다. 데몬을 상대하는 실전 기술로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을 가지런히 하는 하나하나의 지침, 그리고 그 밑바닥의, 아직은 다 알 수는 없는 정신이라는 것까지도.

그러나 그 종교적 결속이 그들 목에 칼이 되어 들어올 줄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으리라.

 

*

 

이테라력 1490년의 샤마슈 토벌령. 천공성으로부터 헌터 탄압의 기미가 있다는 소식에 미레나 콘이나 제스핀 시그 등 세력이 있는 연원들은 미리부터 자기 회원들을 데리고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나 사제들의 집요한 추격은 결국 일라티카 로이 한 사람을 잡아들이는 데만은 성공했고, 끝까지 그녀를 버리지 못했던 한 무리의 헌터들도 본래는 그 수뇌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들은 다 같이 세나노그의 어느 열악한 감옥소에 갇혀 처분만을 기다렸다. 처음부터 이단이라고 결론을 지어놓고 먹잇감이 잡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제세력에게 자기들의 무고함을 강변해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테라를 믿지 않는다라. 하긴, 딱히 믿은 적이 없기는 하네. 큭큭….” 나이 좀 든 헌터들 중에선 자조하며 낄낄거리다 간수들에게 매를 버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이제 샤마슈에 들어온 지 3년째가 된 에레디스 콘이 섞였다. 때로 일라티카는 그 소녀를 비롯한 여러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불러 다독이며 그래도 너희들은 살려야 할 것인데, 하고 되풀이 말하곤 했다. 에레디스에게 미레나가 그랬듯 나이 많은 헌터들이 어린 고아들의 언니 오빠들이었다면, 그 아이들에게 일라티카 로이는 부모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현자의 말은 그저 무력한 한탄만은 아니라 사실 어떤 책임을 스스로 싣고 있는 결의이고 다짐에 가까웠던 것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갇혀 있기만 하던 쪽에선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크로네 공작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나타난 것은 그렇게 날짜를 보내던 어느 밤중이었다. 공작이라고 하는 게 알고 보니 국왕전하의 사촌쯤 된다는 모양이라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었는데 옥에 면회한다고 나타난 그는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썼을 뿐 그리 귀족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째선지 그는 일라티카와는 미리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도 보였다.

“나는 로디아를 살리지는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수많은 마족들을 살렸죠.” 그들끼리만 아는 옛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에 뭔가 긴 거래가 오갔다. “에레디스, 아직 잠들지 않았나요? 이 사람을 잠시 도와주세요.” 그 늦은 시간까지도 깨어서 전말을 다 보고 있던 소녀에게 마지막으로 일라티카가 지시를 했고, 그래서 소녀는 그 공작이라는 사람을 안내해서 옥에 갇힌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윽고 옥문을 열고, 공작은 사람들을 모두 깨워 이열횡대로 세우더니 이렇게 나직이 말했다.

“여기 쓰신 이름들은 이제 모두 죽은 사람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들은 공식적인 처형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잠시 안전한 곳으로 도피해 기다리고 계시면, 내가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 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탈옥이었다. 뭔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일라티카가 온화하게 웃으며 승인의 뜻을 보였기 때문에 모두 그분을 믿고 옥의 뒷문을 빠져나갔다. 무리에서 마지막까지도 일라티카 로이 본인만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에레디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크로네 공작의 인도에 의해 이슈타르 연구소라는 곳에 도착하고 난 다음이었다.

“여러분들을 위해, 일라티카 로이는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별로 대단한 감정이 들어간 것 같지도 않은 공작의 뒤늦은 설명. 그러고 나서 홀로 마녀의 이름을 쓴 일라티카 로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실 알아서 안 되는 것이었지만 에레디스가 굳이 몰래 보고 왔던 바와 같이 되었던 것이다.

그거야말로, 아주 마법 같이, 꿈같이 이루어졌던 잔혹한 어른들 세상의 일이었다.

 

*

 

제 있었던 일을 쭉 털어놓는 에레디스는 시종일관 담담한 편이었다. 자기 운명에 대해서 스스로 슬퍼하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끝에 일라티카 로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던 것도, 물론 있는 그대로 다 잔혹하게 묘사할 수는 없었지만, 바로 전날 밤 크로네 공작에게 있는 감정을 다 쏟아 붓고 만 탓인지 더는 화를 낼 힘도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듣는 꼬마 도련님이 오히려 종래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하고 말았다. “왜, 왜 천공성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괴롭혀?” 이유를 에레디스라고 해서 알았겠는가. 단지 뭐라도 대답을 해야 했으니까 자기들에게 형식적으로 붙었던 죄목을 남 일처럼 주워섬길 뿐.

“이테라를 믿지 않아서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단이라고. 하지만 난, 몰라요, 사실 이유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하곤, 대답을 듣는지 마는지 혼자 엉엉 울어버리는 류세니드를 달래느라 더 신경을 쓰는 수밖에 없었던 에레디스였다.

그녀가 한 행동은 딱 거기까지였다. 슬픈 이야기를 해서 공작 영식을 울려 보냈다는 부분을 빼면 딱히 아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대단한 조종을 더 했는지 추궁을 당해도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며칠이 지난 후 웬 눈 째지고 무섭게 생긴 젊은 귀족 남자가 와서 그녀를 잡을 듯 을렀을 때에도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무, 무슨 짓을 했다고….” 뭐가 잘못됐는지도 말해주지 않고 다짜고짜 신경질을 부리는 남자 앞에서 에레디스는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질려서 더듬거리기만 했다.

이게 어디서 반말이냐고 때릴 듯 손을 들어 보였다가 내린 그는 에레디스가 끝까지 아무 반응이 없자 황당하다는 듯 먼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류세니드 크로네 그 멍청한 꼬마가 혼자 천공성에 가서 일라티카 로이 면회를 신청했다. 사람들한테 들으니 네가 그 공자하고 말을 텄었다는데, 쓸데없는 바람을 넣은 게 아니냐?”

“뭐? 아니, 네? 바, 바람이라니,”

자기를 카옌 일로체 키르디트라고 소개한 남자가 이어서 하는 이야기는 에레디스 듣기에도 황당한 것이었다. “은발인가 뭔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한번 꼭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사제들한테 보기 좋게 쫓겨났다더군. 아니 아예 우리 쪽과 아예 상관이 없을 죄수면 몰라도 이건 숫제 사서 의심을 받겠다는 짓이 아니냐!”

사실 류세니드가 어찌했다는 것은 에레디스가 무슨 잘못을 한 탓이라기보다 그 도련님 본인이 멋대로 철없는 행동을 했다는 쪽이 맞았다. 그래서 카옌도 에레디스 하는 사정 설명을 듣더니 더는 그녀 탓을 못 하고 괜히 바닥을 굴러 화풀이만 했다. 하지만 으레 높으신 분들끼리 뭐가 잘못되면 그 원인제공을 어떻게든 한 아랫사람들이 책임을 뒤집어쓰는 게 아니던가. 소녀는 괜히 자기가 덤터기를 쓸까 싶어 변명을 몇 마디 종알거렸다. “그,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 아니지 않아요? 그앤 우리가 불쌍하다고 그랬다고요. 나도 안 우는데 혼자 엉엉 울었다고. 그냥 죄도 없이 갇힌 일라티카 님한테 관심을 가졌을 뿐인데, 그게 뭐가 나빠?”

“뭐가 나쁘냐고?” 비로소 말문이 터져서 다다거리고 쏘아붙이는 에레디스를 카옌은 다시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이를 악물고 손을 확 뻗더니 그녀의 멱살 정도를 잡았을 뿐이었다. “직접 보는 게 이해가 빠르겠군. 따라와라.”

 

*

 

그러나 살기등등하던 기세와 달리 카옌은 어쩐 일인지 시중드는 사람들을 시켜 에레디스를 깨끗이 씻기고 웬 몸치장을 시키는 것이었다. 지저분하던 더벅머리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양갈래로 묶였다. “이, 이게 뭐죠?” 난생 처음으로 하늘거리는 레이스 옷이며 밑창 딱딱한 구두를 신어본 그녀가 몸을 이상하게 가누며 물었지만 그는 그 우스꽝스런 꼴을 비웃을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아까 같은 몰골로 살롱에 갈 수는 없으니까.” 얼추 귀족 영애 모양이 되었음을 확인한 다음에 간단하게 그가 하는 대답이었다.

향하는 곳은 그전까지 머물던 연구소인지 뭔지 하는 칙칙한 곳이 아니라 햇볕 드는 크로네 공작가의 응접실. 수도귀족 가문에 인맥을 만들고자 하는 영지귀족의 자제들이 참근교대 연간에 상경해서 이런 대귀족의 살롱에 들락거리곤 한다고 했다. 물론 요령 나쁜 뜨내기들은 여기저기 얼굴만 비추고 다니다가 사교계에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꺼내본 채 나날을 허송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지만, 카옌은 자기가 그 가운데 아무 기반도 없이 반천공성파의 연줄을 붙잡은 성공사례라고 자랑처럼 스스로를 설명했다.

“여, 카옌! 누구야, 옆에 그 꼬마 아가씨는?” 과연 먼저 아는 척하며 다가와서는 에레디스까지도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그게 아주 허풍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는 탓에 움찔 놀라는 그 소녀를 카옌이 가리고 서면서 적당히 둘러댔다. “아, 예전에 영지에서 좀 알던 먼 친척인데, 이번에 세나노그 구경을 왔다고 해서 데리고 다니는 참이다. 예의고 뭐고 아직 제대로 되질 못했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하하, 왜. 좀 더 키워 보면 이래저래 꽤 하실 것 같은 아가씨인데?”

“별 농담을….” 씁쓰레한 표정으로 공연히 에레디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위아래로 쓱쓱 훑어보곤 카옌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조금은 더 진지한 이야기였다. “그 호르테스 발디라크인가 하는 자는 요새도 여기 기웃거리나?”

말귀를 알아먹은 상대도 금세 정색을 하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야기를 받았다. “아니. 혼자 순진한 척 깨끗한 척은 다 하는 모양인데, 애초에 천공성파인 발디라크 가 인간인데다 사실상 위단 사제의 스파이나 다름없는 놈이라고. 더 얼씬거리기만 해도 쫓아 보내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큭.”

에레디스는 카옌 곁에 잠자코 서있기만 했다. 애초에 나설 자리도 아니었지만 나누는 이야기의 맥락도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그저 들리는 느낌이 그리 좋지만은 않구나 하고,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한 스무 살 정도만 먹으면 이렇게 편당을 갈라서 배척하고 싸우는 모양이라고 혼자 역겹게 생각한 게 전부였다.

그녀도 아는 류세니드의 이야기는 그런 배경 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렇잖아도 류세니드 그 공자님이 일라티카 로이를 찾아갔네 뭐네 하는 판에 천공성파에 꼬투리 안 잡히게 조심해야지, 안 그래?” “여하간 그놈의 은발 꼬맹이 사고치는 건 못 말린다니까.” 그러고서 예쁘장하게 차린 귀족 영애 영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한다는 소리가 거의 줄곧 그런 살벌한 이야기.

듣자하니 크로네 공작이라는 사람은 귀족 세력 가운데 반천공성파의 주축이었고, 그래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개 지금 천공성이 진행하고 있다는 샤마슈 토벌 건에 대해 하나같이 비딱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혹자는 요사이 정부 감찰기관이며 아카데미아 언론이 천공성을 비난하는데도 정작 공작 혼자 너무 조용한 것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어떤 이들은 어쩌면 공작이 뒤로 천공성을 물 먹일 계략을 준비하고 있느라 조용한 게 분명하다는 소설을 떠벌렸다. 물론, 소설이라고 해도 이미 헌터들을 빼돌리긴 했으니 어느 정도 맞는 추측이 아니었겠느냐만.

그렇게 그 상호 음해와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꼬마 류세니드 크로네가 있음을 에레디스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저 샤마슈의 핍박에 대해 듣고 눈물 흘리고, 자기와 머리색이 같은 갇힌 현자를 보러 갔다는 단순한 행동은 사람 입을 거칠수록 엉뚱한 해석에 날개가 붙었다. 맞는 소리가 있었다는 게 더 무서운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공작이 소싯적에 변경에서 몇 년간을 보낸 적이 있다느니, 그래서 그때 샤마슈와 뭔가 비밀스런 결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느니. 대체 그 은발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그러고 보면 변경에선 그런 머리색이 아주 가끔 보고되기도 한다는 어떤 영지귀족의 증언과 함께, 그러면 수도 한복판에서 류세니드가 그 돌연변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하고. 정말로 연관성이 있는 것 아니더냐고.

현장에서 카옌은 대부분의 추측들을 그저 낭설이라고 남들 따라 하하 웃어넘겼지만 나중에 에레디스를 데리고 돌아올 때의 표정은 다시 무서워졌다.

“잘 들었겠지? 저게, 아무 사정도 모르고 넘겨짚기만 하는 얼치기들한테서 나오는 말이다. 근거를 더 확실하게 해줄 셈이냐?”

추측이 저렇게까지 뻗쳐나간 것이 다 에레디스의 탓이라는 말이었다. 한량 귀족들 가운데서 이슈타르 연구소의 매체공학을 배우겠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그 가운데서도 공작의 최근 동정을 아는 이는 그 밑에서 연락책 노릇을 했던 카옌 정도가 유일했다. 그런데도 아무 근거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결탁이라거나 연관성 같은 소리가 나온다는 말이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사실이 그런 바에야 들킨 다음에 후회해야 늦을 일. 물론 아직까지는 같은 편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니 안전하지만, 혹시라도 저런 당연한 추측이 저쪽 편으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카옌은 이어서 엄포를 늘어놓았다.

“그럼 어떻게 된단 말이죠….” 아직은 귀족 세계의 이야기가 잘 와 닿지 않아서 에레디스는 힘없이 뻔한 질문을 했다. 예상되는 결과가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굳이 다음과 같은 적나라한 번역을 거친 다음이었다.

“죽는다. 이미 죽기로 되어 있는 일라티카 로이는 물론, 공작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빼내 왔던 너희들, 그리고 이 일을 계획한 공작각하 본인이며, 또 어쩌면 아무 죄도 없이 순진하기만 한 그 공자까지도 말이다.”

 

*

 

천공성은 그만큼 무서운 집단이라고 했다. 에레디스는 처음에 다만 그쪽 사제들이 잔인한 고문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현상만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카옌은 그런 짓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저의 속성을 가리켜 더욱 무섭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테라를 모시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이테라를 믿게끔 인도한다고 말하지. 하지만 이미 그 이테라라는 신은 어떤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천공성이 이제 믿는 것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바로 사제계급 자신들이었다. 이미 이테라로부터의 가르침이나 그런 것은 아무렇든 중요하지 않은지도 몰랐다. 오직 자기들의 권력에 반하는 이들을 이단이라 규정할 뿐. 그러나 언제나 이단이라는 규정은 이테라의 이름으로 내려졌고, 그럼에 당하는 이들로선 스스로를 변호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토벌령이라는 게 애초에 왜 제안되었는지 알긴 하나?” 에레디스로선 몰라도 좋았을 근본의 이유까지도 카옌은 굳이 알려주었다. “헌터들이 변경에서 근근히 얻어내는 영석은 거의 전량을 천공성에서 소모한다. 하지만 요즘 영석 값이 연일 올라서 그 예산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너희를 잡아들이고 영석을 몰수하려는 목적이었던 거라고. 하긴 몰수는 이미 했겠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에레디스로선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새 딴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카옌에게 존댓말도 꽤 익숙해졌다. “그렇다면 그들도 원하는 걸 얻었는데 우릴 죽일 것까지는 없잖아요? 우린 벌써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수도에 잡혀 왔는데, 죽이기까지 한다면 나랏님이 아니라 강도나 다를 게 뭐죠!”

“하, 그 대단한 사제님들의 자존심으로선 자기들이 고작 영석 값 같은 게 부담되어서 변경 백성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 구름 위에 사시는 신성한 양반들 빈곤한 상상력으로 트집을 잡기엔 이단이네 뭐네 하는 게 유일이고 최선이라서. 이단이면 살려 보낼 수가 없고, 이단이 아니면 잡아 올 수가 없잖아?” 조롱하듯 말하곤 마지막에 흥, 하고 코웃음을 치는 카옌이었다. 에레디스는 더욱 어쩔 줄 모를 기분이 되었다.

수도라는 곳이 이런 곳인가. 귀족들의 세상이 이러한가. 아직 선악의 기준이 단순한 열두 살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죽고 산다는 일이 데몬에게 갈려 죽는 것보다도 속이 울렁거렸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카옌이나 다른 반천공성파 귀족들도 딱히 이테라 믿는 것으론 안 보였는데. 심지어 대놓고 안 믿는다기보단 단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일 뿐인 샤마슈보다도 저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자기들의 불신을 표출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왜 우리들은 이단이라고 토벌을 당하는 위치에 있고 저들은 그래도 반천공성파라고 당당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귀족인지. 그러면서도 자칫하면 저 대단한 크로네 공작도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위험은 무엇인지.

하지만 그 답은, 카옌이 마지막에 에레디스더러 류세니드가 더는 엉뚱한 짓 못하게 진정시켜 놓으라고 그리 보낸 덕택에 곧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천공성파? 아 그건,” 생각보단 나이를 먹어서 이제 열 살이라는 그 아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하는 대답이라 더욱 괴악했다.

“왕실을 능멸하는 천공성에 맞서서 국왕전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야. 우리 이슈타르 연구소도, 그래서 전하께서 특별히 보호하고 계시거든. 너희를 구해올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고.”

아무리 예쁘게 방싯방싯 웃으며 말하면 무엇 할까. 그건 그냥 에레디스 듣기에, 천공성과 왕실이 귀족세력을 절반으로 갈라 정권투쟁을 한다는, 그 사이에 자기네 샤마슈가 끼어서 치이고 있다는 꿈도 희망도 없는 소리였는데.

 

*

 

아무튼 카옌이 그녀를 떠밀어다 시킨 역할은 수행해야 했다. 류세니드는 처음에 에레디스가 예쁘게 차리고 온 것을 보고 반쯤은 낯설어하고 반쯤은 유쾌해 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야기가 다시 은발의 일라티카 로이 쪽으로 향하자 금세 시무룩해져서 눈을 깔고 말았다.

“너까지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그냥,”

“아뇨, 저, 저희들한테 관심을 가졌다고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치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에레디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카옌이 이리 말하라 한 것을 그대로 읊었다. 사실 그녀 진심으로 이 공자가 자기들에게 모종의 친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비난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나쁘다면 그걸 가지고 자기들끼리 되잖은 소리를 해대는 음흉한 귀족들이 나빴지. 자긴 그러니까, 따지자면 이 아이가 자기 대신 울어줘서 고맙다는 쪽이었는데 표현만 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류세니드가 그 다음에 바로 이렇게 변명했을 때 에레디스는 거기에 재반박할 말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난 꼭 알고 싶었단 말이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아니 오히려, 거기에 대해선 뭔가 숨기는 것만 같아서….”

물론 겉보기에 그 소년의 관심은 은발이라는 현상이었다.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주변의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단순 돌연변이라고만 했다고 한다. 사실 그 이상의 설명은 어느 수도귀족이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류세니드의 아버지인 공작은 명백한 흑발이고, 어머니라는 사람도 약간의 옅은 기미조차 없는 짙은 녹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었으니까.

흔한 가정의 아이였다면 유년기에 부모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주워온 아이인가요. 왜 엄마아빠와 닮지 않았나요. 물론 다른 부분의 생김새를 보면 류세니드가 제 부모 핏줄이 아니라고 할 근거가 없었지만 공작 영식이라고 해서 그런 어린애다운 망상을 한 번도 안 해봤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평범하지 못했던 부분은 신분적인 게 아니라, 제가 주워온 자식이 아님을 모성으로써 단단히 증언해줄 만한 존재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아직 아기일 적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서 언제나 필담을 하셨다고 하기 때문에 남겨진 편지 같은 건 아직까지도 잔뜩 있어. 뭐 워낙 어릴 때 돌아가셨으니 그립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조금, 생각하면 슬프긴 하고.”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편부모 자녀의 자기고백인 것 같았지만 이후에 눈살 찌푸리고 이어지는 요지가 그게 아니었다. “근데 그게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서. 사람들이 다 작당하고 날 속이고 있는 것 같아서.”

어쩌면 그 이야기는 어미 없이 자란 소년의 근거 없는 어리광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실 초문의 에레디스로서야 어디까지가 진짜 믿을 만한 이야기이고 어디부터가 류세니드의 공상인지 구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병으로 돌아가셨다지만 아니야. 조금이라도 아파 보이거나 앓았던 기억은 내게 없어.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곤, 그 다음에는 이전부터 쭉 없었던 사람처럼 돼버렸으니까.”

그래서 소년은 지금까지도 간혹 이상한 꿈을 꾼다고 했다. 그 꿈속에서 외양조차 불확실한 음울한 귀부인은 분명 자기에게 뭔가 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이 세상 말이 아닌 것 같아서 깨고 나면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꿈속 조그만 자신은 마치 그 뜻을 아는 것처럼 응 하고 대답을 하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또 미미하게 웃곤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하고 대화를 했었다고, 그런 얘기를 하면 모두들 내 상상일 뿐이라고 야단치니까 요즘은 말도 안 해. 하지만 상상이 아니야. 내가 알지도 못하는 말을 어떻게 꿈속에서 듣겠어?”

그 소년의 회상 속에 있는 ‘어머니’라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 나중에 덧씌워진 것이었든 간에, 조금도 아프거나 비정상적인 데가 없는 분이라고 했다. 반대로 공작 측근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농아에 병자였다고 증언했다. 그녀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달리 알아봐 줄 제삼자는 없었다. 칼리도나 롯 크로네의 결혼 전 성은 이드렐스. 그 가문은 변경의 영지귀족으로서 데몬과 싸우다 산화했었기 때문에, 마지막 생존자인 그녀에 대해 말해 줄 이가 류세니드 주변에 한 명도 남지 않은 터였다.

자기를 은발로 낳아 놓은 어머니는 어쩌면 주변 사람들이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어째선지 모두들 그 비밀을 호도하고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사실 류세니드의 근거라고 해야 뭐라고 말하든 애매한 유아기의 기억에 지나지 않았다. 앓는 걸 본 기억이 없다곤 해도 아이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부모가 아픈 모습을 일부러 숨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틀렸다고 명백히 증명할 근거도 사실은 미약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확인할 거야.” 은발의 기원일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 만일 은발이라는 것이 일라티카 로이의 경우에서처럼 진정으로 어떤 이단성이라든가 신비로움을 띠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과 공작부인의 죽음 사이엔 무슨 관련이 있었던 것인지. 의지를 다시금 표현하는 소년의 마음은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분노에 가까웠고 화를 내고 있다고 하기엔 생각보다 냉정해 보였다.

에레디스는 그러나 어쨌든 그를 말리라는 역할을 받은 몸이었으니 말은 이렇게 해야 했다. “그렇다곤 해도, 공자님이 일라티카 님을 만나러 갈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없잖아요.” 당위성으로는 아무 할 말이 없어도 현실적 어려움을 짚어서 기를 죽이자고. “사제들에겐 쫓겨나셨다면서요. 또 찾아가려 한대도 이번엔 그 카옌인가 하는 사람이 잡도리를 할 테고. 뭐, 영석 같은 게 있으면 몰래 워프라도 해서 가겠지만 그것도 저희가 천공성에 전부 압수당한 상태라서 떼써도 아무 것도 못 해드려요.”

그러니까 그녀는 갈 수 없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마지막 말이 오히려 류세니드의 귀를 반짝 뜨이게 하는 것이었을 줄 알았겠는가.

“워프?”

“아, 공간이동이라는 샤마슈의 기술인데, 한 번 갔던 장소의 좌표를 알면 마법을 통해서 곧장 오갈 수 있는 마법요.” 물으니 얼결에 설명을 했는데, 갑자기 류세니드가 얼굴색이 확 밝아져 다가들었기 때문에 곧이어 당황해서 덧붙였다. “하지만 말한 대로 모든 마법은, 영석이, 있어야….” 그러나 다그치는 꼬마에겐 뒷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할 수 있어? 에레디스도 할 수 있어?”

“해, 해본 적은 있어요. 하지만 영석을….”

“영석이 그 마법 쓰는 데 사용한다는 단단한 육각형 돌 맞지? 있어! 연구소에 엄청 쌓여 있단 말이야!”

말조차 끊어먹고 해결됐다며 혼자 활짝 핀 얼굴로 외치는 그 소년엔 에레디스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라고요?” 하지만 수도 영석은 천공성이 다 가지고 간다고 카옌이 바로 얼마 전에 말했지 않은가. 어째서 그 귀하다는 것을 여기에서 구할 수 있다는 말이던가.

묻기도 전에 답은 소년으로부터 나왔다. “말했잖아. 우리 연구소가 왕실로부터 지원을 받는다고. 아마 돈으로 따지면 엄청날 걸?” 그것이 꿈도 희망도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이슈타르의 권력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순간 에레디스는 머리라도 얻어맞은 듯 멍하면서도 대단히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잘못이었을까. 그 편승이 잘못이었을까.

 

*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이때 류세니드를 말려야 했다. 나중에 카옌에게 대단한 경을 칠 작정이 아니라면야 공자가 더욱 막나가서 큰 사고라도 치지 않도록 여기서 이성적으로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영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그것도 능력만 되면 무슨 마법이라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영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녀 스스로도 류세니드를 빙자한 다른 속셈이 났던 것이다.

‘그 정도면 일라티카 님을 구해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설핏 점쳐지는 가능성에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잘하면 자기가 류세니드와 함께 감옥소에 잠입해 자기들의 현자를 빼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뒤가 밟힐 수는 있다는 걸 무시한 바는 아니었다. 뭐 크로네 공작가에서 탈주 샤마슈를 숨겨주고 있음이 들키면 공작조차 위험해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여기는 또 엄청난 양의 영석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사제들이 뿔이 나서 잡으러 와도 마법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마법의 강력함에는 에레디스 본인부터가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 샤마슈가 한둘이 아니고 영석이 그만큼이나 쌓여 있다면 무모한 도전욕이나 호승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도와줄 거지?”

그러나 에레디스의 심경이 변하는 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유혹하듯 생글생글 눈웃음치는 공자 앞에서 그녀는 뒷생각을 얼른 감춰야 했다. “네, 아, 네. 도와드릴게요. 가, 같이 가요.”

그렇게 따라간 연구소에서 꺼내어 온 주먹만 한 보석은 햇빛 아래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도 지도를 참고하고 에레디스 기억을 더듬어 좌표를 추정하는 작업은 열두 살짜리에게 꽤 어려웠지만, 그 다음에 보라색 빛이 그녀 주변에 반짝반짝하면서 어린 류세니드의 눈을 현혹하는 것까지는 모두 일사천리로 일어난 일이었다.

“류세니드 님?” 늦은 밤, 천공성 지하에 있을 에레디스의 워프 종착지는 출발할 때와 달리 어두웠다. 바닥에 온몸이 거칠게 패대기쳐지자마자 그녀는 방금 전까지 손을 잡고 있던 류세니드를 찾았지만 아쉽게도 주변에 인기척은 없었다.

“으, 하필이면 지금 오차가….”

몇 미터 정도 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고 마력적으로 그리 위험한 것도 없었지만 일단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녀는 조심스레 벽을 더듬어 짚고 일어섰다. “류세니드 님?” 다시 한 번 눈을 깜짝이며 소리 죽여 부르는데 돌아온 것은 철컥 하는 불길한 금속성과 달갑지 않은 목소리.

“거기 누구냐!”

소리 난 곳을 돌아보니 불빛을 든 사람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봐도 이쪽을 향해 쳐들린 등불에 실루엣이 드러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양쪽으로 퍼지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모습이니 수상하다기보다는 이런 곳에 나타난 게 의아스러울 정도였겠지만, 들킨 입장의 에레디스에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어서 가슴이 순간 철렁하고 말았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 보니 자신은 복도에서 계단으로 통하는 길목의 한구석에 서 있는데 원형 계단 위쪽에 있던 간수가 내려다보며 등불을 들이민 상태였다. 반대쪽은 긴 복도. 아마도 그 길로 한참 따라 들어간 양쪽이 요전까지 헌터들 갇혀 있던 자리인지 대충 눈에 뵈는 모습이 여태 낯이 익었다. 더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에레디스는 그래서 간수가 뭐라고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캄캄한 복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자애? 아니, 이봐 잠깐!”

달칵거리는 구두는 중간에 벗겨져 맨발이 되고 얇은 치맛자락이 찢어져 나풀거렸다. 손에는 아직도 큼지막한 영석이 꼭 쥐여 있었다. 여차하면 사람도 공격해버릴 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왔지만 정작 그럴 상황에 맞닥뜨리니 쉽게 마법이 나가지 않았다. 막는 사람이 있으면 쓰러뜨리고 잠입하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그냥 전투경험이 없는 소녀의 공상일 뿐 지금은 도망치는 것 외에 아무 생각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러나 에레디스가 아무리 열심히 달렸어도 간수가 계단을 내려와서 복도로 쫓아오는 속도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 지하 감옥에서 마녀라는 대죄수를 지키는 사람이 어떻게 한 명뿐이었겠는가. 소리를 듣고 몰려온 간수들이 좁은 복도를 앞뒤로 막고 서는 것도 삽시간이었다. 아무리 자기가 마법사라곤 하지만 사람과, 그것도 성인 남자들과 대적하게 되는 것은 처음이라 포위된 에레디스는 겁에 질려버렸다.

“아니, 멀쩡한 집안 아가씨 같은데 이런 데는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임에도 당장의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레디스가 유의미한 저항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아니었다. 빳빳이 언 채 손목이 잡히고, 그러나 이들의 엉뚱한 친절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굳은 머리로 생각하니, 단지 카옌이 입혀 놓았던 좋은 옷을 보고 이들이 착각한 탓이 아니었느냐는 결론이 나와 더욱 불안해지기만 했다.

아직 크로네 공작이 헌터들에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기는 전이었다. 나가서 밝은 자리에서 신원을 조사하면 탈출한 이단이라는 게 들통 날 게 뻔했다. 어떻게든 이들이 속고 있을 때 일을 끝내야 했는데,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으리라고, 이 사람들은 아직 인간답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를 죽일 자들이라고, 아니, 기왕 적일 바에야 사람이 아니라 그냥 데몬이라고 생각해버리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어이 마법이 나간 것이 그때였다.

손톱만한 보라색 섬광이 잡힌 오른손에서 반짝했다가 사라졌다. 그녀 손목을 잡고 있던 간수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 것은 그 다음.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이놈?” 다른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는 사이도 소녀는 놓치지 않았다. 빙글 돌아서며 꼭 방금 것만 한 작은 빛 조각들을 사방으로 흩더니 금세 모두를 같은 꼴로 만들었다. 졸도. 자유.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혼자 멀쩡한 것은, 겉보기에 가장 약해보이는 소녀 한 사람이었다.

“괜찮아, 주, 죽지는 않는다고 했어….” 과연 그녀는 자기가 한 일을 온전히 감당하지는 못해 떨고 있긴 했다. 싸운다거나 죽인다고 생각하면 아직은 두려움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에게 마법을 쓰면 어떻게 된다더라 하는 것은 들어보기만 했지 직접 경험한 것은 처음이라 확신이 없었다. “천공성이니까, 사제들이, 어떻게든 고쳐주겠지!” 굳이 혼잣말을 해서 자기합리화를 하고,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른 채 그녀는 자빠진 몸뚱이들 사이를 어기적어기적 빠져나왔다.

그러고 났더니 새삼 여기가 어둡다는 것을 알았다. 긴장이 좀 풀린 탓에 한숨이 나오고, 도대체 류세니드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제야 짜증도 좀 났다. 제멋대로 꼬맹이 같으니라고. 이젠 더 쫓아올 사람도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이번에는 소리를 꽤 높여 동행인을 부르기 시작했다.

“류세니드 님! 류세니드 님, 대체 어디 계세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다른 곳에서 그 공자가 남들한테 들킨 것이면 안 되는데. 한참 메아리만 듣고 있던 소녀는 이윽고 간수가 떨어뜨린 등불을 주워서 사방으로 돌리며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찾는 목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지도록 그 길고 시커멓기만 한 복도는 의외로 좀처럼 끝나지가 않았다.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전까지는 백 명 넘는 사람이 들어차 있던 감옥소지만 지금은 모두 탈주했으니 갇힌 사람은 일라티카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나쁜 냄새가 나는 답답한 공기에 벌레며 쥐 소리 같은 것만 발소리에 섞였다. 걷다가 더럭 겁이 난 것은 그래서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만나러 가는 사람은 어디쯤 있는지도 모르겠고, 같이 온 꼬마는 무슨 일인지 실종되어 기척도 없어졌다니.

“류세니드 님! 류세니드! 아이, 참, 이 공자가 정말!”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문득 자리에 멈춰 선 그녀는 오히려 소리를 높여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당장 나와! 나오지 않으면 때려버릴 거야!” 누가 듣거나 말거나 허공에 먼지 섞인 발길질을 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그 사이에 문득 반응이 생겼더라는 것도 처음에는 얼른 알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고서 제 풀에 진을 빼고 그녀가 마침내 조용해졌을 때서야 정적 속에서 새어나온 소리.

“흐윽….”

성질은 자기가 부려 놓고 오싹 소름이 돋아서 등불 든 손을 그리로 홱 돌렸다. 감방 쪽은 아니고 정면의 복도 한가운데였다. 울음소리에 순간 놀라긴 했어도, 다행히 빛 아래 드러난 사람 모양이 바로 자기가 찾던 류세니드 크로네임을 보고 조금 안도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뭐, 뭐야? 여기 있었어…?” 또 왜 꼴사납게 울고 있는 건지는 몰랐다. 어둠이 무서워서? 아니면 설마 때린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제야 기어 나와서? 그렇게 가볍게도 생각해 봤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바닥에 주저앉은 그 아이의 눈은 다가오는 에레디스를 보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그 눈동자는 초점이 탁 풀려 있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낌새는 에레디스도 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게 되었다. “어라, 류세니드, 류세니드 님?” 심상찮은 기색에 소녀는 바닥에 등을 던지고 양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잡은 채 흔들어 깨우려 했다. 그러나 잠든 것도 홀린 것도 아닌데 깨어날 리도 없는 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러고 있어요? 일라티카 님 구하, 아니, 뵈러 가야죠.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나 알아 보겠어요?”

류세니드 입에서 묘한 말이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봤어.” 그러나 그 대답이 눈앞의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라티카 로이…. 만났어. 실은 지금도 보고 있어.” 말하면서도 소년의 눈에서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일라티카 님을 지금 보고 있다고? 에레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네?”

그러나 그게 어떻게 된 말이냐고 묻지 못한 까닭은, 오직 그렇게만 말하고서 류세니드가 탈진한 듯 그녀 품으로 풀썩 기대어 쓰러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잠깐만! 류세, 이보세요, 류세니드 님!”

 

*

 

류세니드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지 알기도 전에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리자 강단 있다는 에레디스도 더는 참지 못하고 그 소년을 떠안은 채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라티카 님은 어떻게 되신 거야! 흑, 왜, 왜 없어…!” 그분을 다시 한 번 보고, 가능하다면 구해서 나가려고까지 자신 있게 생각했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리 빈 방에 불을 비춰 봐도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앞으로도 있다는 보장도, 이 복도가 언제 끝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쓸데없는 짐까지 생겨서 버려놓고 움직이기도 어렵게 되었다. 어쩔 줄 모르고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절망만 기색만 짙어졌다.

하지만 류세니드는 방금 전 분명 ‘보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의미를 에레디스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 자기 앞에 명멸하고 있던 빛을 느끼고 고개를 든 때였다. 흐릿하게 산란하는 빛은 온전한 형상을 이루기는 조금 힘겨운 듯 불안하게 흔들리며 간혹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법을 쓰는 샤마슈의 현자. 어째선지 조금도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머리를 늘어뜨리고 가면을 쓴 새하얀 일라티카 로이. “일라티카, 님?” 이성으로 알아보기 전에 말소리부터 먼저 나왔다.

‘에리? 역시 발견해 주었군요.’ 예전처럼 온화한 그 목소리는 온 사방에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형상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법적인 접선임이야 어느 정도 직감적으로 다가왔지만, 이런 종류의 마법이 있다는 것은 본신이 마법사인 에레디스조차 알지 못했던 바. “일라티카 님? 어, 어떻게?” 그래서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그저 투명한 형상일 뿐인 것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마치 저게 진짜 멀쩡한 일라티카이기라도 한 것처럼,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바람을 담고서.

그러나 당연하게도 손은 그저 아무 저항 없는 허공을 부질없이 갈랐을 뿐이었다. 몸을 관통당한 형상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어쩌면 조금 쓸쓸하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곳에 에리도 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마력의 한계 때문에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엔 접촉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서 한 번, 완전히 사라질 것처럼 크게 깜박여서 에레디스를 다급하게 만들었다가 다시금 조금 옆자리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소년을 데리고 따라오세요, 에리.’

그 실낱같은 연결을 어찌 뿌리치겠는가. 에레디스는 류세니드를 끌고 가는 게 매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여나 형상을 놓칠까 꾸역꾸역 빛을 쫓아갔다. 방향은 오히려 이미 지나온 쪽이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음이 그나마 소녀의 체력으로선 다행이었을 것이다.

목적지까지 아이들을 인도하고 나자 형상은 더 버티기 힘들다는 듯 사정없이 꺼져버렸다. 울리는 듯한 목소리도 더는 없었다. 주위에 감돌던 마력이 일순 사라졌음을 느끼고 에레디스가 제자리에 멈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저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마법의 흔적을 아까는 미처 못 보고 지나치고 말았던 것은 그때 에레디스가 너무 밝은 등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니까 저것은 분명 마력을 매개하는 영석의 반짝임이었다. 끊어질 듯 미약하고 크기도 작았지만 마법사니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기에서부터 이제까지의 환상이 나온 것이라고. “이, 일라티카 님, 거기 계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아무 것도 없는 맨손의 에레디스가 어둠을 향해 미간을 좁히며 묻는 말. 그러나 거기엔 어느 정도의 반가운 확신이 스며 있었다.

거적 스치는 소리. “에, 리….” 그 사이에서 나온 것은 안쓰러울 정도로 쉬어빠진 실제 일라티카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그분이라고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에레디스는 제 영석을 들어 불을 켜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저쪽에서 날아온 마력 한 줄기에 의해 주변을 제대로 밝히기도 전에 꺼뜨려졌다. “켜지 말아요…. 쿨룩, 내 모습은, 보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

깜박 정신을 잃고 있었던 류세니드도 그 철판 긁는 듯한 목소리에 이때쯤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에레디스와는 달리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그는 깨어나자마자 무섭다고 울먹이며 소녀를 더욱 꼭 붙잡았다. “일라티카 님이에요. 안심하세요.” 에레디스가 그리 말했지만 어디 열 살짜리 어린애가 캄캄한 곳에서 쉽게 안정을 했겠는가.

창살을 격한 저쪽에서부터 이리로 몸을 끌고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나자 류세니드는 더욱 자지러질 듯 질려 울었다. 어쩌면 에레디스와 달리 그에겐 어둠이 눈에 익었기 때문에 일라티카의 귀신 꼴을 어렴풋이 보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완전히 그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일라티카가 창살 밖으로 손을 쑥 뻗어 류세니드의 작은 손을 덥석 잡았을 때 그 소년은 악 소리를 지르며 에레디스 뒤로 숨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도 잠시 뿐 힘주어 맞잡은 손의 온기가 생각 외로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시끄러운 것은 그나마 곧 잦아들게 되었다. “히끅….”

“안녕하세요, 작은 공작. 내가 일라티카 로이입니다.” 여전히 긁는 듯한 금속성 목소리. 그러나 이번에는 고통도 모두 누르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이어지는 소개였다. 정신이 빠져 있는 류세니드를 대신해 에레디스가 제 용건을 두서없이 말했다. “일라티카 님, 우리 여기서 나가요. 쟤가 그러는데 크로네 공작의 집에는 영석이 다 쓰지도 못할 정도로 쌓여 있대요. 그거면 천공성도 이길 수 있을 거니까, 이러고 있지 말고 나가서 싸워요. 네?”

그러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혹은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어른의 대답일 수도 있었다. “에리, 난 나갈 수 없어요. 공작과 약속했으니까요.”

“네?”

“내 말 들어요, 에레디스 콘. 지금의 우리들로선, 콜록, 아직 천공성의 3천 사제들을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자기가 그랬지 않느냐고. 자기는 죽더라도 에리 같은 어린이들은 꼭 살릴 거라고. 거듭, 거듭, 몇 번이나.

그 말을 하며 류세니드를 잡은 손 안쪽에서 다시 반짝이는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을 받아 일라티카의 눈도 뭔가 희번덕거린다고 느껴졌다.

“그러니까 살아. 굴욕적이고 치욕적이더라도, 꼭.”

에레디스가 뭐라고 더 말해 볼, 말려 볼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 마지막의 명령과 함께, 자그맣게 반짝이던 흰 빛이 순간 커다랗게 폭발하며 세 사람을 감싸버렸으니까.

 

*

 

그 뒤에는 사실 어떻게 된 것인지 에레디스는 잘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공작 저택 서재의 정확히 출발했던 그 자리, 넝마 같은 지도와 흐트러진 필기구들 그리고 마법 잔해 사이에서 발견되었고 각자 얼마간을 자리보전하며 앓았더라고 했다. 헌터들이나 웬만한 이슈타르 사람들은 그냥 그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험하게 놀다가 다치고 감기쯤 든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에레디스도 딱 그만큼의 야단만 들으면 되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도련님이라는 사람이 어디서 놀다가 아파가지고 왔는데, 공작이 자식 문제에 대단히 무던한 모양이라고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냥 있을 법한 일이라는 소문 정도에서 그쳤다. 그럴 만도 한 게, 그 공작은 바깥 일로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라 최근에는 헌터들의 경황을 살피는 일에도 뜸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긴 원래도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이었겠지만 헌터들을 숨겨놓고 위조 신분을 만드는 것도 대단히 성가신 일이었을 테니까.

아무튼 에레디스는 자기가 겪었으면서도 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뭔가 일이 일어나긴 했던 것일까. 그냥 마법은 좀 썼다 치고 그 서재에서 둘이 얌전히 꿈이라도 꾼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그때 자기가 간수도 쓰러뜨리고 나왔는데 침입자가 있었다는 보고가 당연히 천공성에 들어가지 않았을지, 거기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져서 공작도 이미 곤란을 겪고 있는 일이 아닐지 혼자 위태로운 추측을 했지만 어디 물어볼 자리도 없었다. 주변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순수한 아이들의 영역 같았다.

기억이 맞음을 서로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면 류세니드 디엘 크로네 그가 유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년도 어쩐지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팠다고는 하는데, 에레디스는 금방 회복한 것을 비교해 보면 그렇게까지 심하게나 아픈 것이었을까.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좀 외견이 수척해진 듯 보이는 류세니드가 비로소 샤마슈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은 그보다 한참 시일이 흘러서였다. 꽤 날짜가 지난 다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 안 나타났으면 에레디스도 일라티카와의 애매한 만남을 그냥 묻어두고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류세니드는 결국 나타났다. 심지어 그 손에는 심지어 헌터들을 조금 흔들어놓을지도 모르는 증거물을 쥔 채로 말이다.

“이거, 돌려주러 왔어.”

처음에야 샤마슈 사람들도 류세니드 일을 예사로 여겼으니, 그 도련님이 돌려줄 물건이 있다 함은 당연히 에레디스의 뭔가를 집어가거나 했던 것이리라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평범하게 실을 꼬아 만든 펜던트였다. 귀할 이유도 놀랄 까닭도 없을 그런 흔한 수공예품. 그것도 본래는 가운데의 매듭에 뭔가 광석이 물려 있었던 것 같지만 그마저도 빠져서 볼품없이 돼버린 상태였다. 빠진 자리에는 조금 불에 그슬린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낡고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그 되다 만 펜던트는 그것을 가까이서 보고 정체를 알아채자마자 모든 헌터들을 기절할 듯 놀라게 만든 물건이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일라티카와 함께 있었던 그들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경악에 쐐기를 박은 것은 류세니드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설명. “내가 일라티카 로이를 만나고 왔거든. 가운데 있던 빛나는 돌은 워프해서 돌아올 때 왠지 타서 없어져버렸지만, 그래도 남은 거나마 당신들한테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말만 남기고 멍해진 헌터들 앞에서 류세니드는 그 자리를 훌쩍 떠났다. 떠나려고 했다. 그가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조금 늦게 전해 듣고서 에레디스가 뛰어나가 쫓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류세니드 님! 자, 잠깐!”

 

*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뭘 봤던 거냐고. 쫓아가서 옷자락을 잡자마자 다짜고짜 따지는 말이 급했다. “헉, 류세, 헉, 그, 무슨, 헉….”

상대적으로 담담해 보이는 류세니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발을 멈추어 숨을 고르는 에레디스를 기다렸다. 무슨 일 있었느냐고 앞뒤 없는 질문을 받는 그 표정은 좀 멍해 보이기도 했다. “혹시 너 일라티카 로이의 사명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나 그 끝에 나온 반문은 더욱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네? 사, 사명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됐어. 말 해봤자 안 믿을 걸.”

그러나 역시 아이는 아이.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공작에게도 차마 다 말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헌터들에게 얘기할까 찾아갔다 해도 결국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것을 에레디스 혼자서 공유하게 되었다. 믿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눈빛으로는 제발 들어달라고, 믿어달라고 말하는 듯이.

오직 그 마법의 내용은 당사자인 류세니드 크로네 홀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에레디스에게는 간단한 정지영상을 보여줄 정도 마력밖에 남겨놓지 않았던 일라티카 로이는 그 전에 류세니드에게 자기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단지 헌터일 뿐인 그녀가 어떻게 아는가, 또 왜 하필 류세니드 크로네인가, 또 그게 모두 진실인가, 홀린 상태에서 그런 것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은 기억의 전이처럼 뇌리에서 뇌리로 바로 이어졌었으니까.

10년도 더 전에 젊은 감찰관 델피온 키진 크로네는 변경에서 어떤 아름다운 배우자를 얻었다. 그러나 그 녹색 머리 여자를 둘러싼 내기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단지 감찰 하나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천공성의 거대한 비인간성을 저지하기 위해, 인간 형상을 한 악마와의 사이에서 그 자신과 후대의 운명을 건 내기를.

‘로디아, 그러니까 롯은 본래 변경의 길 잃은 마족이지요. 당시 그런 마족들은 초창기였던 샤마슈에서 보호하고 있었지만, 종종 생체실험 재료로 천공성 산하기관에 잡혀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러고서 어떤 성격 나빠 보이는 과학자에게 화를 내는 델피온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 사이에 무슨 협상이 있는 듯하더니, 꿈에서만 어렴풋이 보이던 어머니, 그녀, 롯, 로디아, 칼리도나 롯 이드렐스의 고이 면사포 쓴 자태와 그 곁의 크로네 공작의 모습까지도.

‘어떤 과정인지는 모르지만 공작이 희생한 대가로 마족에 대한 생체실험은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중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수도에 간 후의 일은 나는 알지 못하지요. 안타깝게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공작도 아시겠지요.’

거기에서 끊어진 장면은 그 다음에 일라티카 로이 자신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길에 버려진 만삭의 여자, 신원은 알 수 없었다 하고, 그녀를 구해 아이를 받은 늙수그레한 남자, 곧 죽어버린 여자, 그 아래에서 키워진 아이. 작은 은발의 여자아이. ‘아마도 나 역시, 완전히 인간의 자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건 좀 더 자라서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 덕에 나는 믿을 수 있었던 거예요. 마계라는 것이 존재하고, 신족이 아니더라도 인간을 구제할 방법이 있다는 걸.’

그 뒤로 보여주는 것은 양부모를 다 잃고 도로 고아가 되어 집을 나선 일라티카의 고생스러운 초년 인생, 마계로의 탐색 이후 불현듯 다가온 계시와 샤마슈의 결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세한 내용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변경의 비참함 가운데 오롯이 샤마슈만이 구원이라는 인상만은 또렷이 남았다.

일라티카는 가끔 맨얼굴로 친절하게 나서기도 하고,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한 채 교주처럼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나 같은 타자가 아니라 그 자신들이어야 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런 역할이 필요했지요. 그게 나의 사명. 하지만 이제는, 끝이 온 것 같네요, 작은 공작.’

마지막에 들려온 그 사명이라는 이야기는 아주 이상한 것이었다. 남들에게 말하기로는 하늘이나 신족과 같은 대단한 존재가 계시를 내렸다고 말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지 몰랐는데, 실제로 그녀의 사명은 그런 남들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깊이 깨달은 다음에야 아는 존재라고 했다.

‘아무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인간을 위해 누군가는 받아 이어져야 하기는 하지요. 매번 다른 형태로, 다른 구원으로…. 작은 공작이 싫다면 받지 않아도 좋지만, 하지만 언젠가,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는, 감히 외면할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 말은 곧 류세니드가 언젠가 그 ‘다음 사명’을 받을 존재라는 말이었다. 꿈속처럼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로, 머릿속에 울리는 류세니드의 말이 외쳤다. ‘사명이란 게 대체 뭐예요?’

‘인간을 구하는 것. 그리고,’ 그쯤에서 환상은 그치고 감옥소의 어두운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그 가운데 고깃덩어리 일라티카 로이가 있다는 게 눈앞의 현실과 다를 뿐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다른 모든 인간을 위해, 자기 스스로의 인간성을 때로는 과감히 포기하는 것….’

채찍, 인두, 칼날, 온갖 모욕과 고통, 그런 것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가상의 현자는 점점 더 인간 아닌 몰골로 변해갔다. 그래서 류세니드는 울었던 것이다. 내가 사명 받을 존재라고? 저렇게? 현실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공포가 절정에 이르러서였다. 류세니드, 류세니드님,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자기 알아보겠느냐고. 그렇게 몸 전체가 앞뒤로 흔들리고. 봤어, 봤다고.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그 진중한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사실 듣는 입장에선 너무 현실에서 붕 뜬 것 같은 이야기라 에레디스는 단번에 잘 공감을 할 수 없었다. “그분의 사명을, 류세니드 님이요? 왜요?”

“거봐, 역시 안 믿을 거라고 했잖아.”

“아니, 안 믿는다는 게 아니라….” 시무룩해지는 류세니드를 붙잡아 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괜찮아, 실은 나도 안 믿으니까.” 오히려 그러고선 누가 안 믿어도 자긴 별로 설득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는 그 소년이었다.

어쩌면 류세니드는 그 비참한 앞길에 공연히 신경을 많이 쓰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같았다. “내가 혹시 받게 되면, 그 방법을 가르쳐 줄 사람도 또 주변에 나타날 거라고는 하지만….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난 예언 같은 건 안 믿는 걸. 단지 일라티카 로이가, 내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서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불안하지만.”

그러니까 그때 가서 거부할 수 있으면 거부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방금 설명된 일라티카 로이의 사명이라는 게 듣자하니 받아 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좋은 직위의 승계와는 전혀 무관하고, 목표의 실체도 애매한데다, 어떤 식으로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조차 본인이 아니면 전혀 알 수가 없는 종류. 그리고 심지어 그 끝은. 최후는.

‘인간을 구하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류를 위기에서부터 구하라. 그야말로 이단 교주 같은 말이었다. 그런 초월적인 것을 어떻게 진심으로 이어받을 수 있다는 말이던가. 류세니드는 언젠가 그것이 제 앞에 다가온다면 도망쳐버릴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그 교주의 신도들 앞에서 승계를 받는다고 말을 해야 좋을지 감히 받지 않겠다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에레디스도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도 말을 꺼내지 못하게 된, 두 아이들 사이의 비밀이었다.

 

*

 

기묘한 일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채 시간만 무심하게 흘렀다. 공작 영식이 일라티카의 유품을 받아왔더라는 것도 공작에게 말이 들어가면 사단이 날까 봐 헌터들 사이에서 쉬쉬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새 신분증은 이슈타르 연구원이자 번듯한 수도시민에 해당하는 것으로 공작이 카옌 편에 보내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유나 시즈라인이라. 너무 여자애 같은 이름이잖아?” 낯선 이름 옆에 박힌 양갈래머리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에레디스가 뇌었을 때 뒤에서 그 새 이름을 부르는 앳되고 낯익은 목소리를 깨달았다. “유나,”

거기 있는 것은 다시 며칠 만에 보는 류세니드였다.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고 얼굴은 전보다 더 핏기가 없었지만, 어째선지 머리는 제 아버지와 꼭 같은 검은색으로 그새 물을 들인 소년이었다. “오늘이 일라티카 로이의 처형 날이야. 보러 가지 않을래?”

“류세…?” 제안하는 사람도 이상하고 제안의 내용도 이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는 까닭을 알 것 같아서, 이제 수도시민답게 단정한 옷을 잘 차려입은 에레디스, 아니 유나 시즈라인은 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마지막이잖아. 끝나면 절대 볼 수가 없잖아. 복수도, 무엇도.” 하려는 말을 과도하게 생략해버린 탓인지 경미한 실어증 기미까지 보이는 그가 책 읽는 것처럼 딱딱하게 말했다. “사명도, 말인가요….” 생략되었을 한마디를 덧붙이며 유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 쓰러질 것 같은 소년의 손끝을 잡았다.

“그, 그래요. 가 봐요.” 약간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간다고 해서 자기가 두 눈을 뜨고 현장을 볼 수 있을지는 몰랐다. 단지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간다고 말했을 뿐.

그렇게 둘이 올라탄 마차에서 류세니드는 어째선지 거의 무의미한 정보를 어디서 그렇게 긁어모아 왔나 모르게 중얼중얼 연신 쓸데없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 실어증 기미가 여전했지만 듣기 괴로운 것은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문과 처형을 주관한 사제 이름은 위단 루펜 이테라. 그 이하 총 14명 2반의 평사제 및 견습사제들이 일정에 관여. 이단 선고한 AES 인퀴지터 3인 이름….”

“그만, 류세니드 님, 그만.”

“형명(刑名)은 이단이니까 본래 총살이어야 하지만, 지방의 불만세력을 모아 준동시켰다는 반역 혐의가 인정되어서 참형, 그 중에도 제일 아프다는 능지(陵遲)를 한 다음에 숨이 끊어지면 형식적으로 시신을 총격하기로….”

“왜 그러세요, 정말!”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유나가 벌떡 일어나 말릴 정도가 되자 류세니드도 순간 입을 꾹 닫았다. 그러고선 잠시 침묵하다가 별안간 좀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배시시 웃더니 아무렇지 않게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아, 그렇지, 이제 안전한 신분을 받았으니까 너희 헌터들은 어떡할 거야? 신분증이 이슈타르 연구원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원한다면 변경의 헌터 생활로 돌아가도 좋을 거라고 아버지께서 그러셨어.”

오직 그 질문만 보자면 유나도 그냥 자기 계획대로 쉽게 대답했어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눈앞의 소년이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서, 자기에게 무슨 구원을 청하는 것 같아서 차마 버리고 떠날 거라고도, 머물러 장차 사명을 받게 할 거라고도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애써 태연한 척 반문을 했다. “어쨌든 그간 신세진 것에 대해서 공작께 일정 부분 보은은 할 거라고 다들 얘기하지만, 류세니드 님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몰라. 모르겠어. 하하….”

웃는지 우는지 모르게 류세니드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을 그때 먼 총성이 울렸다. 마차는 계속 덜컹대며 달리고 있었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길거리를 아까부터 뱅뱅 돌고 있는 것이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죽었네, 우리들의 현자. 나의 하나뿐인 동종(同種).”

숙인 채 시니컬하게 그 소년이 말했다. 방싯방싯 잘 웃고 금세 울음보를 터뜨리곤 하던 며칠 전의 꼬마는 없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살짝 들고 뜬금없이 묻기도 했다. “사실 난 너희들에게 복수하게 해 주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 그것은 음울하고, 권력적이며, 거꾸로 저항적이며 정당하기도 한 아이러니를 짙게 띠고 있었다.

유나는 그게 사실 자기가 처음부터 크로네 공작가에 원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한순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등허리를 파르르 떨며 일단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느 세월에요? 영석이 저렇게 많아도 샤마슈 가지고는 사제들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데. 일라티카 님이 우리에게 살아남으라고 말씀했는데.”

물론 그 열 살짜리라고 무슨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겠는가. “몰라, 언젠가는…. 내 사명이란 게 이끄는 대로.” 그렇게 말하고 자기 스스로도 좀 우스운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현실을 완전히 잊은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그 뒤에 말로서 알 수 있긴 했다. “어쨌든 천공성에 대항하려면 이슈타르밖에 없긴 할 테니까. 그러니까 가지 말고, 한 번 지켜봐 줘봤으면 해. 내가 뭐가 되는지.”

그래서 그 화려한 초청에 따라 그 수도 권력에 편승했다는 것이, 시민의 비참한 현자를 위해 기어이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추호라도, 잘못됨이 있었겠는가.

두어 달이 지나 샤마슈 토벌 건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지 않게 되었을 무렵, 야밤을 틈타 이슈타르로부터 일군의 자유민들이 변경으로 향하는 수레를 탔다. 개중에는 미레나 콘에게 찾아가는 이들도 있었을 테지만 그 가운데 유나 시즈라인의 이름은 없었다. 연구소에 남은 이들은 당초 감옥소에서 구해온 인원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수.

그것이 곧, 현재와 같은 이슈타르 조직의 실질적 시작이었다고 후일 기록되는 바였다.


(Leucenid Propaganda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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